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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굴다리 조산소 . (Happy birthday to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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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산소助産所라는 곳이 있다.

배를 만드는 조산소가 아니라

옛날 산파들이 아기가 태어나는 임산부를 의료시설(소크라테스 산파설 들어봤지?)

어머니는 그곳에서 나를 낳으셨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태어날 적 기억은 인간 누구에게나 없기에

어린 난 어떤 곳인지 무척 궁금했다.

국민학생(그때는 그렇게 불렀지)이 되고 난 후

그곳을 가봤다. 시장통 전철 다리 아래 어두운 굴다리를 지나야 했다.

버려진 술병에 음침하고 종이 박스 위에 누워있는 노숙인이 자주 있었던 지하도

가슴이 콩닥콩닥 두근거리지만 용기를 내야만 지나갈 수 있었다.

리어카 보관소와 술집 포장마차를 돌아서 길 건너에 허름한 건물 위에 정자체로 쓰여 있었다.

 '굴다리 조산소'(혹은 '전농동 조산소' 약간 헷갈린다.) 

밝은 색 계열의 페인트가 벽에 칠해져 있고 빨간색 벽돌로 지어진 3층 건물로 기억한다.

그 당시 국민학교 시절 전농동에 사는 같은 반 친구들 집에서 돌아올 때

좁은 골목들을 이리저리 지나 큰길 옆 조산소 벽을 손으로 만지며 걷기도 하고

청과물 시장에 있던 'OO 교회'가 전농동 '태양아파트' 상가로 옮겼을 때

혼자'서 어두 컴컴한 굴다리를 지나칠 때 찬송가를 부르면서

지나가던 낡은 보도블럭 퇴락한 길 건너를 얼핏 보며

"내가 여기서 태어나다니!"

얼른 눈길을 돌렸던 그 곳

지금은 1호선 청량리역에서 용산행 구간 지하철을 타면

다니던 초등학교만 보이고 조산소는 나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가난한 시절, 아마도 이 땅의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조산소에서 아기들을 낳고, 

며칠 후에 바로 일하러 가셨을 게다.

지금처럼 산부인과, 현대식 산후조리원이 없던 때라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지 않으면 나의 가족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어떻게 당신만 산후 휴식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랴!

부모님들께 물어보면

"너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하고 

어린 마음 눈물지게 했던 말들과 뒤영켜

손가락에도 모자라는 어린 시절 사진에

사진기를 살 수도 없었던 부모들을 원망하기도 하고

태양아파트에 살던 같은 반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자기들끼리만 놀려던 친구들이 밉기도 해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철길 근처 놀이터에 들려

힘껏 땅을 차올라 그네를 타다

해가 노랗게 물들 저녁 즈음에야

어두운 굴다리를 지나

복작복작했던 시장통이 한산해질 무렵에야

여섯 식구 단칸

지하 방에 돌아왔다.

눈물 날 틈도 없이

가난한 삶은 질곡진 굴다리로

날 잡아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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